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징웨이 정권 (문단 편집) == 외교 및 이념 == 왕징웨이 정권은 [[쑨원]]의 주장에 근거한 대[[아시아주의]]를 표방하고 [[일본 제국]], [[만주국]] 등과 함께 [[대동아 공영권]]에 동조하였다. 또한 [[독일인]]들은 자국의 기술을 발전시킨 위대한 인종이며 지난 10년간 독일을 강대국으로 번영시킨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 정권]]을 찬양하는 반면 유대인들은 영국과 미국을 조종하여 전 세계를 통제하려고 한다고 주장하여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일본 제국 정부도 "전력을 다해 협조하고 지원하기로 하였다"며 호응하였다. 또한 앵글로색슨적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전파를 거부하고 중국의 전통 유교를 숭상했다. 이러한 견해는 왕징웨이 정권의 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정권 치하에서는 영어교육, 무역과 행정에서의 영어 사용이 축소되고 기독교 미션스쿨과 기독교 선교가 금지되었다. 그렇다고 동시에 근대화에 아주 반동적인 것은 아니었는데, 정권 각료 주화인(周化人)은 일본 제국을 동양의 정신문화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습득한 모범으로 받아들여 왕징웨이 정권이 나아가야 할 롤모델로 인식하기도 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을 서양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묘사하였고 휘하에 선전부를 두어 지역의 언론을 통제하고 반서방 선전물을 퍼뜨렸다.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왕징웨이 정권은 중일간의 갈등과 아시아 국가들간의 전쟁은 서구 열강들이 유도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사실 왕징웨이 정권이 처음부터 미국을 적대시한 것은 아니었다. 건국 초기에는 미국에 대해 우호도 아니고, 적대도 아닌 애매한 입장을 유지하였으나 일본이 미국을 적대시하기 시작한 1942년부터 왕징웨이 정권도 반미로 입장을 선회한 것이였다. 1940년대 왕징웨이 정권은 서방을 적대시하지 않았고, 국제 공산주의만 적대하였다. 이는 국공합작을 유지하고 일본에 대항하는 충칭의 국민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한 충칭 국민정부에게 항일전쟁은 무의미하다는 선전을 계속했지만 한편으론 충칭 정부와 싸우지 않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심지어 1943년 조계 회수 무렵에는 충칭 정부를 적대해야 할 대상이 아닌 '''동포의 정권'''으로 규정하였다. 1940년 3월 설립된 왕징웨이 정권 외무부는 유럽의 추축국에 대사를 파견하였다. 1941년 7월 1일,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은 왕징웨이의 정부를 [[중국 대륙]]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였다. 같은 날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 왕국]], [[루마니아 왕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도 왕징웨이 정권을 승인하였고 충칭의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여기에 대항하여 7월 4일 독일, 이탈리아와 단교하였다. 8월 초에는 [[프란시스코 프랑코|프랑코]]의 [[프랑코 정권|스페인국]]이 왕징웨이 정권을 승인하였다. 이후 1941년 11월 22일에는 왕징웨이 정권이 [[방공 협정]]에 가입하면서 [[태국]]과 일본의 괴뢰국인 [[자유 인도 임시정부]], [[버마국]], [[필리핀 제2공화국]]도 왕징웨이 정권을 승인했다. 1942년 이탈리아는 [[바티칸]]에 왕징웨이 정부를 승인하도록 강요하였으나, [[비오 12세]]는 거부하였다. [[비시 프랑스]] 역시 왕징웨이 정권을 승인하지 않았다. 또한 1940년 12월 10일에는 같은 괴뢰국 처지인 --[[동병상련]]-- [[만주국]]에 특사 쉬량(徐良) 외교부장을 파견해 [[선통제|푸이]]에게 국서를 전달했다. 만주국도 1941년 1월과 8월에 왕징웨이 정권으로 대사를 파견해주었다. 그러나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도 분명히 드러나는데, 왕징웨이 정권은 한때 만주국을 황제인 푸이 대신 중화민국 정부의 관리를 보내 통치하려고 했고, 푸이도 중일전쟁 당시 일면저항 일면교섭을 주장하는 왕징웨이를 두고 "세상을 기만하는 이중수단"이라고 표현했으며 왕징웨이 정권을 "괴뢰"라고 일기에 적었다. 그러나 1943년 4월 10일 [[태평양 전쟁]]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황제를 알현한 저우포하이도 푸이를 "박식하고, 두뇌가 명석하다"며 고평가하면서도 "만약 [[청나라|청조]]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실로 현세의 군주가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금일에는 그 포부를 발휘할 방법이 없다."고 한탄하며 만주국이나 왕징웨이 정권이나 일본의 괴뢰국에 불과한 현실을 질타하였다. 또한 저우포하이는 만주국을 방문하는 동안 만주국의 근대 시설과 대규모 공장,[* 일본과 만주국은「만주 중공업 [[5개년 계획]]」으로 만주에 일본의 여느 공장에도 뒤처지지 않는 수준, 심지어 당시 세계적 수준의 최신식의 대형 공장들과 중공업 산업시설을 건설하였다.] 발전소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난징정부의 중공업은 몇 년 몇 월에 시작해야 발전전망이 보일지 모르겠다", "스스로에 대해 조바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며 부러움을 표했다.[* 아론 스티브 무어의 「대동아를 건설하다: 일본제국의 기술과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실제로 왕징웨이 정권하의 중국은 만주국을 모델로 삼아 도시개발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